묵공장과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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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성마을 원조' 장순녀 할머니

구성마을에 이사온지 40년이 넘으셨습니다. 이제는 마을 전체를 손바닥 들여다보듯 하신답니다. 나이가 들면 어지러운 아파트 모양이 다 비슷해보여 집 못 찾아오는 노인들이 많다는데, 구성마을 할머니들은 그런 걱정에서는 자유 그 자체입니다. 병원이며 시장이며 친구며 가족 모두가 걸어서 찾을 수 있는 곳에 위치해 있습니다. 할머니는 어디든지 걸어 다니십니다. 할머니와 걷다보면 걷는 걸음 수보다 멈춰 서는 횟수가 더 많습니다.
"어디 바삐가니껴?"
"이제 집안일 다 해두고 방티(대야) 구하러 가."
지나가는 사람이 모두 할머니가 아는 사람입니다. 영주에서 나고 자란 장순녀 할머니, 또 구성마을에서 나고 자란 장 할머니의 아이들, 이 마을이 구성마을이란 이름으로 불리기 전부터 할머니의 핏줄들이 마을의 골목골목 이불 누비듯 누비고 다녔을 것입니다.
"비만오면 온 사방에 물이 철철 넘치고 근처가 다 벼밭이었어. 사람보다 지네가 더 많았지."
할머니는 내노라하는 쌀 도매집의 딸이었습니다. 역 앞에서 장사를 했었는데, 부도가 나며 가세가 기울었습니다. 그러다 어린 나이에 구성마을로 시집오며 아예 이 곳에 터를 잡으신 것입니다. 처음 이 마을에 왔을 때, 생활환경은 너무나도 열악했습니다. 근처에 쓰레기들이 마구 버려져 있었고, 비만오면 흙길이 물길이 되어 흘렀습니다. 또 '도둑놈이 구성마을로 숨어들면 잡을 생각을 말아야 한다'하는 말이 있을만큼 어둡고 후미진 동네라 혼자 다니기 무서운 곳이기도 했습니다. 그러던 마을이 4~5년만에 방송국에서 취재도 오고 전국 각지에서 묵만들기 체험을 오는 곳으로 역변(逆變)한 것입니다. 놀라운 변화입니다.
"이제 우리는 가족이야. 아니, 가족보다 더 가까운 사이야."
아침 7시만되면 '구성마을 16인방'이 모이는 할매 묵공장, 구성마을 16안방은 할매 묵공장이 세워질때까지 전심 전력을 다한 멤버이며 '절친'과 같은 존재입니다.
"가족들은 별로 안좋아하지, 묵공장만 가면 식구들이 저녁을 먹든 말든 집에를 잘 안오니까..."
말끝을 흐리며 어린아이처럼 웃으시는 할머니의 얼굴이 해사합니다.


'마을 대표 일꾼' 권분자 할머니

"봄이면 아카시아 향기가 퍼지고, 가을이면 도토리가 골목 골목을 굴러다니는 곳이 이 마을이야."

19살, 복숭아꽃같은 나이에 직장 때문에 구성마을에 오시게 되었다는 권분자 할머니
70년대 초에 마을로 오셔서 이 곳의 오랜 모습들을 모두 기억하고 계신답니다. 불바위 밑으로 고개 숙이고 지나야 했던 좁은 길이며, 비만 오면 부엌 안까지 물이 넘쳐 집안에서 장화를 신고 다녔던 일이며, 근처에 단 하나 있던 만화 가게와 조그만 리어카에 팔던 핫도그까지, 밥을 새로 지으면 온 동네 사람들이 모여 다 같이 나눠 먹는 동네, 생일이며 제사며 집안일이 있을 때마다 함께 모여 음식도 하고 나누기도 하는 그야말로 가족같은 동네가 바로 여기였답니다.

"이 할매 묵공장이 세월질 수 있었던 첫 번째 조건은 서로 가족 같은 사이였다는 거야. 네가 잘못 한것 있으면 내가 하면 되니까."

통장 일을 하다보니 폐가가 된 채로 집을 버려두고 떠나는 마을 사람들이 안타까워, 뭐라도 해 보자고 힘을 모든 세월이 꼬박 4년이 되었습니다. 쓰레기더미였던 마을에 일자리가 생기고, 길이 나고, 집이 새롭게 지어졌습니다. 이 도시재생사업은 인생을 함께 살 만큼 살고 서로 깊이 이해하는 사이끼리 가슴으로 했던 사업이었다고 회상하십니다. 할매 묵공장에는 고용인 - 피고용인이 없습니다. 모두가 이사이며, 전부가 주인입니다.
할머니 한분 한분이 이사의 자격으로 사회적 협동조합 인가를 받았습니다. 할머니들은 대충이란걸 모르십니다. 이 할매 묵공장은 할머니들의 삶 그자체입니다.


'경력도 최고(最高), 나이도 최고(最古)' 대장 임시연 할머니

임시연 할머니는 올해 86세입니다.
동네에서 제일 나이가 많습니다. 그래서인지 할머니 이야기는 텔레비전 예능 프로보다 더 재미있고 구성집니다.
할머니는 할매 묵고장이 생기기 전 과정들을 낱낱이 다 기억하고 계십니다. 다른 사람들이 구성 마을에 대해 이야기 할 때 연도가 틀리거나 조금이라도 어설픈 기억력으로 이야기를 하면 가차없이 수정해주십니다.
" 지금으로부터 6~7년전부터 우리끼리 모여 이것저것 만들었다구, 처음엔 도라지나 더덕을 까서 팔았지. 그러다 마을 통장 제안으로 할매들이 메미을 직접 다 갈고 내려서 한 판에 12조각으로 나눠 팔았어. 홍보하고 할게 뭐 있었어. 입소문이 나서 매일같이 사람들이 찾아와 없어서 못 팔았지."
메밀, 방티(커다란 대야), 솥만 들고 아무 집에나 모여 무작정 만들기 시작한 묵, 이제는 도시재생 센터를 통해 전문적인 교육을 받으시고 메밀을 가는 것에서부터 포장까지 깨끗하게 현대화 된 기기를 사용해 능숙하게 하십니다.
"우리는 업무 분장이란게 없어. 다 알아서 손발이 맞아. 워낙 오래 해왔으니까."
일일이 서로 설명하고 지적하고 할게 없단다. 한 사람이 콩을 불리면 다른 사람이 얼른 불을 올리고 또 다른 사람은 포장할 준비를 하는 식입니다. 일과 놀이와 쉼과 작업이 격의 없이 넘나들며 더 없이 자유롭습니다. 그리고 할매들의 묵은 더 없이 고소합니다.


'매일 갈데가 있어 행복한' 이옥남 할머니

"매일 갈 데가 있다는 것이 정말 좋아요. 우리 동네는 행운의 동네에요."

철도 고등학교를 나온 남편을 멀리 취직시켜 보내고 시댁과 함께 이 마을로 들어오셨다는 이옥남 할머니.
이사오고 나서 골목이 어찌나 여러 갈래인지 집을 못 찾을 정도였다며 웃으십니다.
할머니께서 이 마을을 한마디로 정의해 주신 것이 있습니다. 바로 '타인이 없는 동네'입니다.
이 마을에는 시골의 후덕한 인심을 가진 동네사람들이 남아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과 매일 얼굴을 맞대고 다른 사람을 위한 음식을 봉사하듯 만들며 일하는 것이 좋다고 하십니다. 나이가 들어서도 아침 일찍 나서서 갈 데가 있다는 것이 얼마나 행복한가를 얘기하시며 또 고운 미소를 지으십니다. 그러고는 또 짧은 이야기를 마치고 서둘러 일어서시는데 어디를 가시냐 물으니,
"내가 또 운전을 유일하게 할 줄 알잖아요. 우리는 배달도 해요."
하시며 차 열쇠를 들고 나가신다.
이 시대의 살아있는 커리어우먼의 모습이었습니다.


'이제는 매일이 행복한' 안갑여 할머니

"만나면 반갑고, 일하니 즐겁고, 매일 갈 데가 있다는 것이 행복해."

항상 밝은 얼굴을 하고 계시는 안 할머니.
무슨 말씀을 하시든지 웃으며 하신다.
"서울, 상주, 원주, 예천 등 안가본 곳이 없어. 우리가 공부를 얼마나 열심히 했는데."
할매 묵공장이 세워지기전, 도시재생프로그램을 통해 할머니들은 전국을 돌다니며 폐허같던 마을을 지금같은 곳으로 만들기 위해 다른 지역의 사례를 통해 배우고 준비하셨습니다. 얼마 전에는 '우수한 사회적 기업'으로 선정되어 대기업의 지원도 얻어 내셨답니다.
"선정된 팀 모두가 젊은 사람들뿐이고 할매들은 우리밖에 없었어."
이 한마디가 있기까지 얼마나 많은 고민과 고생이 있었을까.
"직장이 생겼다는 것이 좋아. 우리는 노는 듯이 일해."
나이가 들어서 출근할 곳이 있고 할 일이 있고 일할 수 있어 행복하다는 안 할머니. 세월이 묻히지 않고 귾임없이 공부하며 일하며 웃을 수 있는 할머니의 삶이 아름답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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